영원한 애플CEO 스티브 잡스 입양시절 부터 죽음까지 이야기 1

영원한 애플CEO 스티브 잡스 입양시절 부터 죽음까지 이야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오바마의 말 처럼 우리들은 전 세계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순간 그가 발명한 제품을 통해 소통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 봐주세요.

스티브 잡스 (Steve Jobs)의 친부모에게 기구한 사연이 있다. 스티브 잡스 (Steve Jobs)의 친아버지는 시리아인이었는데, 대학 시절 미국 유학을 왔다가 조앤이 아는 한 백인 여자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한 결국 아이가 생겨버리고, 이 아이가 바로 스티브 잡스 (Steve Jobs)였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조앤 쪽 아버지는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 남자의 아이가 생겼다는 말에 결혼을 극도로 반대한 것은 물론, 당장 뱃속에 있는 아이를 지우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하지만 조앤 커플은 결국 부모 몰래 스티브 잡스 (Steve Jobs)를 낳았죠. 이 사실을 한 조앤의 아버지는 당장 아이를 내다 버리지 않으면 절연해야 불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영원한 애플CEO 스티브 잡스 입양시절 부터 죽음까지 이야기 1
스티브잡스 친부모

결국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조회는 스티브 잡스 (Steve Jobs)가 태어난 바로 다음날 입양 신청 서류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때 입양의 중요 조건으로 내걸었던 것은 대졸 부부였습니다.

조앤 커플은 아들이 고학력자 부모 밑에서 자라길 바랐지만, 당시 만에도 부부가 모두 고학 역자인 경우는 흔치 않았죠. 결국 일주일을 넘게 기다린 끝에, 한 가난한 부부가 입양 의사를 표현해 왔습니다.

그런데 입양 동의서를 쓰기로 한 당일, 부부가 사실은 자신들은 대졸자가 아님을 고백했고, 조회는 크게 실망하며 입양을 바로 철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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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부모

난임으로 인해 아이가 간절했던 부부는, 이 아이가 크면 꼭 대학에 보내겠다고 맹세한다면 스티브 잡스 (Steve Jobs)를 달라고 애원했고, 이 말이 진심임을 직감한 조앤 커플은 결국 입양에 동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스티브 잡스 (Steve Jobs)를 입양 보낸 지 불과 두 달 만에 결혼을 극도로 반대하던 조엔의 아버지가 지병으로 사망했고, 그제서야 조앤은 어머니로부터 시리아인 남자 친구와 결혼을 허락받았습니다.

결혼과 동시에, 이둘은 입양 보냈던 스티브 잡스 (Steve Jobs)를 다시 찾으려 수소문 했지만, 당시 미국 입양 법상 한 번 입양 보낸 아이를 되찾을 순 없었죠.

결국 이둘은 새로 아이를 가지게 되고, 스티브 잡스 (Steve Jobs)는 그렇게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수십 년을 양부모 밑에서 자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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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리사(가운데)와 여동생 모나 심슨(Mona Simpson)과 함께하는 스티브(Steve), 1986)

스티브 잡스를 입양한 부분은 가난하기는 했지만, 양아들을 애지중지하며 키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엄청나게 속을 썩이는 아들이였다고 합니다.

호기심이 워낙 강해서 바퀴벌레 살충제를 먹다가 응급실로 실려가기도 하고, 금속 핀으로 콘셉트를 쑤시다가 감전사고로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선생님 의자 밑에… 폭죽을 설치해 부모님이 학교로 불려간 적도 있었죠.

사태가 이를 경험하게 되자, 아빠는 그를 조용히 착오로 불러내더니 정체모를 기계들과 온갖 흉기가 들어 있는 공부 상자를 내밀었습니다.

그러더니 대도 마음껏 때려 부으라고 시켰죠. 밖에서 사고 칠 바에야 차라리 여기다가 화풀이를 하고 제발 밖에선 사고 좀 치지 말라는 의도였습니다. 참다참다 극단적인 방법을 썼던 것이죠.

그런데 부셔 버리라고 준 기계들을 혼자 만지작거리던 스티브 잡스 (Steve Jobs)는 그 내부 구조와 작동 원리에 호기심이 생겼고, 고물 전자 계기들을 직접 수리하고 개조하는 것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스티브 잡스 (Steve Jobs) 12살 때는 혼자 주파수 측정 전기를 만들다가 중요한 부품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투툼한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당시 글로벌 대기업이던 HP 창업자 빌 휴렛에 집으로 대뜸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주파수 측정기를 만들려고 하는데 혹시 남는 부품이 없느냐 하며 당돌하게 물었죠.

열차라 소년이 기특했던 빌 휴렛은 호탕하게 웃으며 부품을 보내 주었을뿐 아니라, 그의 여름 방학 때 스티브 잡스 (Steve Jobs)를 초대해 HP의 아르바이트까지 하게 해줬습니다.

이 아르바이트 역시 주파수 측정기를 만드는 일이었죠. 이런 아들이 대견했던 아버지는 아예 착오의 아들의 작업실까지 만들어 주며 꿈을 키워 주었습니다.

아빠 스티브는 그럼에도 스티브를 입양할 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를 악물고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저축했습니다. 결국, 스티브는 부모님의 바람대로 대학 진학을 했지만, 단 한 아기만의 중퇴를 하게 됩니다.

도저히 부모님이 피땀흘려 모은 전재산을 자신의 대학에 때려 받기에는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죠. 스티브는 양부모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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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스티브 잡스 (Steve Jobs)는 대학 중퇴 직전까지도 조금이라도 부모님의 금전적 부담을 덜어주고 싶다며 집을 따로 구하지 않고 친구들의 기숙사를 전전하며 생활했고, 단 돈을 벌기 위해 쓰레기장을 뒤져 콜라병을 모았으며, 주말마다 공짜 식사를 얻어먹기 위해 무려 11km 거리의 불교 사원까지 왕복했는데, 대학을 그만둔 스티븐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착오에서 기기들을 만지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티브는 인생의 귀인을 만나게 되는데, 훗날 애플의 공동 창업주가 되는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 이야기였습니다.

할 일 없이 친구와 동네를 걷고 있던 스티브는 어느 날 차고 물을 활짝 열고 기계들을 만지고 있는 워즈니악을 본 이후, 함께 있던 친구가 워즈니악과 아는 사이라며 소개시켜줬고, 이렇게 두 남자의 전설적인 만남이 이어졌죠.

스티브잡스 보다 5살 많은 워즈니악은 당시 대기업 HP 다니고 있었고 그야말로 천재였습니다. 스티브의 비현실적인 아이디어를 현실화 시키는 데에 성공했었죠.

스티브 잡스 (Steve Jobs) 의 사업의 시작

하루는 워즈니악(Steve Wozniak)이 직접 개발한 게임을 스티브 잡스(Steve Jobs) 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습니다.

탁구를 응용한 게임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히트한 비디오 게임인 퐁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변형한 게임이었죠.

워즈니악의 게임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진 스티브는 이 게임으로 당시 미국 최고의 게임 회사인 아타리를 찾아갔습니다..

워즈니악 혼자서 만든 게임이었지만 자신과 친구 둘이서 만든 게임이라며 보여줬습니다.

아타리의 실무진은 이 게임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스티브 잡스를 고용했습니다.

Getty Images
Getty Images / 1983

친구를 팔아 취업을 하게 된 스티브 잡스(Steve Jobs) 는 경영진으로부터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라는 임무를 받게 되는데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4일이면 만들어 올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리고는 워즈니악(Steve Wozniak)에게 달려와 빨리 만들어 내라고 독촉했습니다. 워즈니악(Steve Wozniak)은 4일은 절대 할 수 없는 기간이라고 난색을 표했지만 스티브 잡스(Steve Jobs)은 이번 것을 만들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며 꼬셨습니다.

결국 워즈니악(Steve Wozniak)은 낮에는 회사를 다니고 밤에는 차고에서 게임을 만들며 4일 밤을 거의 새다시피 하며,기한에 맞춰서 부랴부랴 완성한 이 게임은 바로 1인용 게임의 신기원을 열었던 그 게임, 벽돌깨기 입니다.

해성처럼 등장한 이 게임은 이듬해 전 세계 게임 순위 탑 3에 들며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고 내려오는 공을 받아치면서 벽돌들을 깨 부순다는 직관적인 컨셉은 시대마다 초월하며 오랜 사랑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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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즈니악의 벽돌깨기

이후 수십년 동안 수많은 파생 작품이 만들어졌죠. 이 게임에 크게 만족한 아타리는 워즈니악(Steve Wozniak)에게 약속한 금액보다도 더 많은 5,000달러의 보수를 주었습니다.

오늘날의 물가로 따지면 약 3,500만 원에 해당하는 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돈을 받은 후 워즈니악(Steve Wozniak)을 찾아온 워즈니악(Steve Wozniak)는 보수로 700달러만 받았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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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즈니악(Steve Wozniak)과 함께

실제 받은 돈의 15%에도 미치지 않는 수였고, 그리고는 이 돈을 딱 반으로 나누자며 350달러만 워즈니악(Steve Wozniak)에게 주었습니다.

워즈니악은 당연히 이 말을 찰떡같이 믿었는데, 훗날 아타리 사장의 발언으로 사실은 스티브가 5,000달러를 받았다는 것이 알려지자 그제서야 속았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티브(Steve Jobs)가 그 돈을 사적으로 쓰지 않고 그대로 전부 사업에 재투자했다는 걸 알고는 서운함을 불었다고 하죠.

스티브(Steve Jobs)는 워즈니아(Steve Wozniak)과 함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고, 워즈니악에게 자기와 사업을 하자고 꼬시기 시작했습니다.


워즈니아(Steve Wozniak)이 개발을 막고 자신이 영업을 하면 역사의 남을 회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워즈니악(Steve Wozniak)은 스티브(Steve Jobs)의 가설에 홀딱 넘어갔고,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이 창업한 회사가 바로 오늘날의 글로벌 대기업 애플입니다. 그렇게 의기 투합하여 회사를 세운 이둘은 망했습니다.

야심차게 출시한 컴퓨터 애플 1이 석연치 않은 판매 실적을 냈던 것이죠. 지금 와서 보면 충격적인 디자인이지만 케이스가 없이 단란 기판만 있었으며, 심지어 모니터나 키보드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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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1 제품을 들고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

게다가 70년대 당시 가격이 90만 원 정도로 맥도날드 빅맥이 800원이었던 시절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터무니 없이 비싼 금액이었습니다.

공장이 없었던 스티브(Steve Jobs)는 하나하나 납 뎀을 해가며 수작업으로 컴퓨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단랑 200대 안 되는 물량만을 생산했는데, 이러다 보니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제품은 어마어마한 프리미엄이 붙어 버렸죠.

10년 전에는 한 대가 약 9억에 거래됐으며, 현재 가치는 한 대당 수십 10억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2015년에는 한 여성이 사별한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고가의 애플 1인 줄도 모르고 재활용 업체에 이걸 기부해 버렸는데, 업체는 바로 경매에 내놓아 수억원을 벌게 됐죠.

감사한 마음에 기부 여성을 찾아 절반을 지불하려 했지만, 끝끝내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애플 1로 시행착오를 겪은 스티브(Steve Jobs)와 워즈니악(Steve Wozniak)은 이후 모니터와 키보드를 내장한 일체형 컴퓨터 애플 2를 출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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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2

때마침 미국에선 가정마다 컴퓨터를 들여놓는게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였고, 시기를 잘 타내 투는 그야말로 초대박을 터뜨리지, 한입 빼어 먹은 무지개색 사과 로고가 탄생된 것도 바로 이 때였습니다.

애플 2가 불티나게 팔려나간 덕분에 애플은 창업한 지 겨우 5년 만에 자산 같이 2,700억 원으로 거듭났습니다. 오늘날의 물가로 환산하면 거의 2조원의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수치였고, 이 모든 걸 이룬 스티브 잡스의 나이는 당시 고작 25살, 20대 중반의 나이의 어마어마한 부와 명성을 거머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일인 자는 없다는 오래된 진리의 말처럼 애플의 질주를 가로방 막는 라이벌이 등장하고 말았으니 바로 IBM이었습니다. 처음에 스티브 잡스는 IBM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오히려 경쟁자의 등장을 환영한다는 광고까지 내걸며 여유만만한 모습을 보였죠. 하지만 애플 2의 후속으로 출시한 고가 애플 3가 IBM 적가 정책에 밀려 폭망하게 되자, 스티브 잡스는 슬슬 초조함을 느꼈습니다.

하루는 분을 못 이겨 IBM 본사 로고 앞에서 가운데 손가락 욕을 하다가 사진을 지키기도 했죠. 부진한 실적이 반복되며 투자자들의 압박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습니다. 게다가 부하 직원들 중에는 25살의 젊은 사장을 입고하는 사람이 많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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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 본사 로고 앞에서

당시만해도 이 정도 규모의 기업 사장이 25살이라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시기 공동 창업자였던 워즈니악(Steve Wozniak)은 당시 큰 비행기 사고를 당해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심한 기억상실증을 앓는 듯 더 이상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워즈니악(Steve Wozniak)은 몇 년 간의 장기 휴가를 떠나게 되고 스티브 잡스의 부담감은 더욱 가중됐고 결국 극심한 실적 압박에 시달린 스티브 잡스는 부하들을 닦달하기 시작하는데 무려 주 90시간 근무라는 초강수를 뒀으며 조금이라도 실수를 했다간 가차 없이 해고했습니다.


이 시기 직원들은 스티브 잡스와 한 엘리베이터에 타게 되는 것을 가장 무서워했는데 묻는 말에 조금만 대답을 잘못해도 모가지가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스티브 잡스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직원에게 ‘여기서 무슨 일을 맡고 있냐?’고 물었는데 직원이 멈멈 거리며 자신의 업무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자 ‘그럼 회사에 꼭 필요한 일은 아닌가 보구나’라고 말하며 그 자리에서 그 직원을 바로 해고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몇 년이 흐르고 건강을 회복한 워즈니악(Steve Wozniak)이 회사로 복귀했습니다. 이때 워즈는 그야말로 까무러칠 정도로 깜짝 놀라게 되죠. 불과 몇 년 사이에 애플이 더 이상 그가 기억하던 회사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직원들은 하나같이 야근을 밥먹듯이 하며 좀비처럼 터벅터벅 걸어다녔고 회사 건물 전체에서 냉랭한 공기가 감돌았고 게다가 제품 개발 부서들은 서로 협업은 커녕 마치 원수처럼 살벌하게 우금 됐습니다. 이 모든 일을 본 워즈 이학은 회사 생활의 염증을 느끼고 자신의 모든 주식을 팔아치우며 사표를 내게 되죠.

워즈니악(Steve Wozniak)이 떠난 이후에도 스티브(Steve Jobs)의 고군분투는 계속되었지만 애플의 실적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이 사회는 ‘사장이라는 놈이 실적도 못 내면서 회사 분위기만 망치고 있다’며 결국 투표를 붙여 스티브 잡스를 해고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스티브(Steve Jobs)는 자신이 직접 세운 회사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죠. 큰 배신감을 느낀 스티브(Steve Jobs)는 ‘어차피 망을 회사’라며 보유하고 있던 애플 주식을 딱 한 장만 남기고 모두 파라 치웠습니다.

딱 한 장만 남겼던 이유는 애플보다 더 큰 회사를 만들어 성공시킨 다음에 초라해질 때로 초라해진 애플 주식을 보며 마음껏 비웃어 주겠다는 의도였고 그렇게 복수를 꿈꾸며 야심차게 넥스트라는 컴퓨터 회사를 설립한 스티브(Steve Jobs)은 망했습니다.

출시하는 컴퓨터마다 경쟁사에 밀려 참패했고 해가 갈수록 적자에 허덕이기 시작했죠.

심지어 애플은 스티브가 애플의 내부 정보를 이용해 새 회사를 창업했다고 소송까지 걸어왔습니다. 의지할 곳 없던 이 시기, 스티브는 오죽하면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까지 찾아가 학교 선생님들에게 자신의 회사에 투자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죠.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단돈 1달러조차 내어주는 일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전 재산까지 말아먹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컴퓨터가 잘 팔리지 않자 차라리 프로그램 개발에 주력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CG를 만드는 작은 회사를 인수했는데, 이게 또 하나의 악수가 되면서 빈만 차곡차곡 쌓여갔죠. 게다가 주주들을 더욱 속터지게 했던 것은 스티브(Steve Jobs)가 인수한 CG 팀을 가지고 난데없이 애니메이션 제작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주의의 염려와 달리 스티브 잡스 (Steve Jobs)는 이런 결정이 말도 안 되는 기적을 불러왔으니, CG 팀이 제작한 단편 애니메이션이 그의 아카데미 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의 CG 애니메이션 수상이었던 틴토이라는 제목의 5분짜리 단편이었는데, 당시가 1988년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놀라운 그래픽이었다.

애니메이션이 더 큰 시장에서도 먹힐 거라고 판단한 스티브 잡스 (Steve Jobs)는 아예 80분짜리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도록 허가해 주는데, 애니메이션이 바로 전 세계 최초 3D 장편 애니메이션인 토이 스토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인수했던 작은 회사는 그 유명한 토이스토리의 제작사 픽사였던 것이죠. 픽사의 토이 스토리는 영화 애니메이션 모두를 통틀어 그의 전 세계 박스 오피스 1위라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거의 파산 직전까지 갔었던 픽사가 스티브 잡스 (Steve Jobs)의 뚝심 있는 투자로 인해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것이죠.
이후 픽사는 벅스 라이프, 몬스터 주식, 회사 니모 등 많은 흥행작들을 만들어냈고, 결국 디즈니에게 매각되며 스티브 잡스는 단숨에 디즈니 개인 최대 주주로 지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행운이 스티브 잡스 (Steve Jobs)에게 쏠렸던 것인지, 스티브 잡스 (Steve Jobs)를 내쫓은 애플은 처참히 망해 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애플은 오늘날의 아이패드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뉴턴 패드라는 신제품을 야심차게 출시했으나, 시대를 너무 앞서 가서 그런지 폭망하고 말았죠.

게다가 이 시기에 애플의 경쟁사였던 빌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95를 출시하며 본격적으로 PC 시장의 1인자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애플은 스티브가 떠난 지 10년 만에 시장 점율 88% 의 초라한 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죠.

그야말로 썩은 사과가 돼 버린 애플은 초강수를 두기로 하는데, 이전에 매몰차게 내쫓아 버렸던 스티브 잡스를 다시 불러들여 경영을 맡기기로 한 것이죠. 결국 자신들이 틀렸었다, 납작 엎드린 애플을 본 스티브 잡스 (Steve Jobs)는 흐뭇한 표정으로을 받아들였고, 자신의 회사 넥스트와 애플을 합병시켜 다시 한 번 애플의 CEO가 되었습니다.


CEO 된 스티브 잡스는 부임 후 3,000명을 해고했습니다. 이번에는 감정적인 중동이 아니라 철저한 내부 감사를 통해 구조 조정을 한 것이죠.

게다가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연봉을 단 1달러만 받겠다고 선언하며 이후 무려 14년을 정말로 1달러의 연봉만 받게 되는데, 이는 CEO로서 솔선수범하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져 애플의 직원들은 그를 진정한 회사를 사랑하고 회사를 위해 모든 걸 바치는 대표로 여기게 됩니다.


폭발적인 기대치를 받은 스티브 잡스 (Steve Jobs)는 이후 승승장구하기 시작합니다. 고작 1년 만에 1조원의 적자에 허덕이던 회사를 4천억 흑자 회사로 탈바꿈 시켰죠.

이 기적 같은 업적에는 새로 출시한 아이맥이 큰 몫을 했는데, 편리함을 무기로 내세운 이 컴퓨터는 당시까지만 해도 여러 스텝을 거쳐야 힘겹게 연결할 수 있는 인터넷을 단 세 가지 스텝으로 연결할 수 있는 혁명적인 기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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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킨토시

사실상 단 두 단계로 인터넷을 연결한다는 건 당시로서는 세계였고, 이 광고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미국에서 엄청난 붐을 일으킵니다.

게다가 당시에 크고 박한 PC에 비해 곡선형의 반투명 아이맥은 디자인적으로도 신선했죠. 은애플의 전성기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2007년 아이폰, 2010년 아이패드를 연달아 출시하며 전세계적으로 현대인들의 문화를 주도하기 시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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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맥

오늘날에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당시만해도 그가 발표한 기술은 놀라울 정도의 신세계였습니다..
하면 덕지덕지 자판이 딸려 있던 시대였으니 스티브가 보여준 이 터치 기술은 그야말로 환호가 터져나올 정도의 신세계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 스티브 잡스의 몸에선 거대한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아이폰을 발표하기 대략 4년 전에 이미 최장암 선고를 받은 상황이었죠.

다행히 초기에 발견되어 바로 수술을 하면 생존율이 75% 있다는 꽤 희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스티브 잡스는 이 황금 같은 시기에 고집을 부리다가 병을 키우게 됩니다.

자신의 몸에 칼을 대는 것이 싫다며 수술을 거부하고 시기요, 침술, 명상 등의 대체의학에 의존한 것이죠. 주변에서 하도 닥달하지만 결국 암진단을 받은 지 6개월 만에 수술 때 오르게 되는데, 이때는 이미 암세포가 많이 퍼진 시점이었습니다.

그나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며 회복만 잘하면 완치하다 좋은 신호를 받았지만, 스티브 잡스는 이번에는 먹는 것으로 고집을 부리다가 제대로 회복할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퇴원할 당시 병원에서는 영양 섭취를 잘하라고 신음 당부했는데, 오랜 세월 엄격한 채식주의자였던 스티브 잡스는 최정 절제 후 회복에 필수적인 단백질 섭취를 소홀히 하고 원래 먹던 대로 먹겠다며 끝끝내 채식을 고집했습니다.


결국 스티브 잡스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갔고 간 이식 수술까지 받기에 이르렀죠. 중요한 회의를 하다가 도중에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2011년 8월,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는지 CEO 사임한다고 공표했습니다.


그리고 사임한지 불과 한 달 만에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죠.한동안 스티브 잡스의 유언이라 퍼져 나갔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비즈니스 세상에서 성공의 끝을 보았다. 그러나 병들어 놓아 과거 삶을 회상하는 이 순간, 나는 깨닫는다. 내가 자부심을 가졌던 부하 명예는 결국 죽음 앞에선 의미 없다는 것을.”난 지금 어둠 속에서 생명 연장 장치의 녹색 빛을 보고 윙윙거리는 기계음을 들으며 죽음의 신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난 이제서야 깨닫는다. 삶을 유지할 적당한 불을 쌓았다면, 그 이후에는 부하 무관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걸 이원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며 급속도로 퍼져나갔는데, 나중에야 스티브 잡스의 유언이 아닌 다른 CEO 유언이었다 밝혀졌죠.

그러면서 스티브 잡스의 삶과 묘하게 맞아 떨어졌기에 아마도 스티브 잡스가 투병을 하며 느꼈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전 세계 애플 지점 앞에는 추모의 행렬이 따랐습니다. 꽃이나 초를 가져온 사람도 있었고, 상징적인 의미로 사과를 두고 가는 자들도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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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통령이던 오바마는 영상을 통해 전 세계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순간 그가 발명한 제품을 통해 이 뉴스를 보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업적인가!”라고 말하며 그를 치하하였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거주했던 캘리포니아 주는 이날을 ‘스티브 잡스의 날’로 지정했습니다.